[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Ⅰ)


케인스는 어떤 세상을 바랐는가?

많은 사람이 경제학을 대단히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함을 주장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 스스로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부를 때, 거기엔 이런 자신감이 은근히 배어 있다. 그러나 이런 명성과 자만은 사실 별 근거가 없다. 왜 그럴까? 경제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인데, 달리 말하면 이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없이 경제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케인스가 제기한 철학적 질문

논의를 인문학으로 좁혀 보자. 인문학 가운데에서도 철학은 경제학의 전제는 물론 모델과 정책마저 결정한다. 존재론, 인식론, 본성론, 윤리론 등 경제학 모델 및 정책과 관련되지 않는 주제가 없지만, 오늘 다룰 케인스의 1930년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은 그중에서도 특히 윤리론과 관련된다. 윤리론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다. 예수와 사탄 사이에 벌어진 ‘사람은 떡으로 사는가, 아니면 말씀으로 사는가?’에 대한 논쟁은 철학에서 한편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다른 한편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모습을 취했다. 곧, 인간은 쾌락과 공리를 위해 사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의, 연대, 공동선에 입각하는 ‘좋은삶’을 지향하는가?

 

케인스의 1930년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본성론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인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본성, 곧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에 관한 주제는 물론 ‘기능적’ 본성에 관한 주제도 포함한다. 가령, 인간은 노동하는 ‘호모라보란스’(Homo laborans)인가, 유희와 여가를 즐기는 ‘호모루덴스’(Homo Ludens)인가? 이 짧은 에세이에서 케인스는 이 두 가지 철학적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곤 그는 먼저 인간에게 노동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삶에서 전부를 차지해선 안 되고, 그것보다 오히려 여가를 즐겨야 한다고 본다. 호모라보란스보다 호모루덴스가 본성에 가까우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인간은 쾌락과 공리보다 ‘좋은삶’을 지향하며, 더욱이 여가를 선용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제레미 벤담의 헤도니즘(쾌락주의)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좋은삶) 전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케인스가 이런 강력한 본성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으며,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그 가능성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 ‘일정한 조건’이란 물적 조건이 충분히 확보될 경우, 곧 경제가 충분히 성장해 ‘경제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겐 노동보다 여가가 필요하다

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경제가 성장해 ‘희소성’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노동보다 여가를 선택함으로써 여유롭고도 좋은삶을 살 수 있는데, 이 에세이를 쓸 시대를 기준으로 100년이 지나면 그의 손자와 손녀들은 이런 세상을 맞이할텐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2030년이 바로 그 시기인데, 지금부터 6년 후가 된다.

케인스의 주장을 하나씩 확인해 보자. “앞으로 100년 후에는 선진국의 생활 수준이 지금보다 4배에서 8배는 높아질 것”(p.51)이며,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아주 오랫동안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루 3시간 정도의 일이면 우리 대부분이 내면의 세속적 본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p.55) “내 결론은 ….. 경제문제는 앞으로 100년 안에 해결되거나 그 해법이 적어도 가시권 내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즉, 미래를 조망해 보면 경제문제는 인류가 처한 영구적인 문제가 아니다.”(p.52)

“만약 경제문제가 해결된다면, 인류는 오랫동안 품어 온 목적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모든 진정한 가치를 믿는다면 경제문제의 해결은 적어도 이득을 가져올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있는데, “일반인이 수많은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습관과 본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몇십 년 안에 재조정한다는 것은 두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신경쇠약’같은 증세를 겪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미 영국과 미국의 부유층 부인들 사이에서 흔히 목격되는 신경쇠약을 조금씩 겪고 있다. 그들 다수는 부유함 때문에 원래 해왔던 많은 직업과 임무를 빼앗긴 불운한 여성들로,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동인을 잃자 요리하고 청소하고 수선하는 일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그보다 더 즐거운 일도 찾지 못한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달콤한 여가를 고대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으면 간절함은 사라진다.”(p.53)

“따라서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창조된 이래로 처음으로 실질적이고 영구적인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 얻은 자유를 어떻게 누릴 것이고, 과학과 복리가 안겨줄 여가를 어떻게 채울 것이며,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현명하고 알차게 잘 살 수 있을까?”(p.54) 이런 실질적으로 영구적인 문제를 케인스의 손자 손녀들은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케인스는 “우리가 경험을 조금만 쌓으면 새롭게 발견한 자연의 혜택들을 오늘날 부유층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고 삶의 계획 또한 그들과 전혀 다르게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p.55) 우리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다소 혐오스럽고 심지어 범죄나 질병과 같은 특성까지 있어서 정신과 전문의에게 맡겨야 할” 가짜도덕에서 벗어나 ‘좋은삶’을 찾아 나설 것이다. “우리는 이제 확실한 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탐욕은 악이고 고리대금 행위는 악행이며, 돈에 대한 애정은 혐오할 만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지혜와 미덕의 길을 가장 참되게 걷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수단보다 목적을 더 가치있게 여기고 유용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시간, 그리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더 고결하고 값지게 보낼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경제적 안위를 위해 사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챙기는 일이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58~59). 우리의 본성은 좋은삶이라는 진짜도덕(!)에 맞게 진화되었다!

 

좋은삶을 향한 수단으로서 일반이론

케인스의 주장을 이처럼 상세히 나열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또 다른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1936)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케인스가 가슴에 품었던 진정한 철학과 비전에 대해서는 대부분 정작 모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일반이론』을 집필하면서 어떤 세상을 예상하며 기대하고 있었을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그의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1930)을 읽지 않고서는 『일반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동안 그의 제자들이 쌓아 온 업적의 가치도 적극적으로 평가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케인스의 1930년 이 에세이를 그가 세운 ‘목적’으로, 1936년의 저서를 이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

케인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16명의 세계적 석학이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에서 제각기 자신의 견해들을 제안했다. 케인스가 예측한 성장수준에 대해선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가 품은 윤리론과 본성론, 또 그로부터 예측되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갈린다. 윤리론, 본성론, 삶의 방식을 기준 삼아 대략 세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모든 이가 케인스의 오류를 지적한다. 석학들이 볼 때 지적할 만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오류 가능성에 직면한 이론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케인스의 윤리론을 지지하는 첫 번째 집단

첫 번째 집단은 케인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의 본성론과 윤리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집단이다. 피브리지오 질리보티 취리히대 교수(2장), 조지프 스티글리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3장), 악셀 레이욘후부드 UCLA 교수(7장), 레오나르도 베체티 로마 토르 베르가타대 교수(14장), 윌리엄 보몰 뉴욕대 교수(15장) 등 5명은 경제성장과 소득은 케인스가 전망한 수준에 많이 근접했으므로, 이제는 성장보다 분배에 초점을 두면서 그가 예상하고 염원했던 세상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자고 한다. 불평등, 과시소비, 일중독, 기후위기로 드러나는 작금의 상황은 케인스의 좋은삶을 가로막고 있다.

먼저 2장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 75년 후 글로벌 관점에서 따져보기」에서 질리보티 교수는 케인스의 좋은삶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럼 케인스가 예측한 변화의 증거는 확인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심화되는 비만 문제는 우리 식습관의 양적 (질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 다른 요인은 의료 서비스, 녹지, 노인 돌봄같이 일상생활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재공급의 축소에 대한 압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적 부가 위협받는 상황, 그리고 공적 빈곤까지 더해진 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재 투자를 줄이면 결국 사적 소비만 더 늘어난다.”(p.80)

좋은 삶은커녕 나빠지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없는가? “성장의 문화적 함의에 관한 케인스의 예측은 더 문제가 있고, 물질적 욕구가 충분히 만족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징후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 나는 경제성장이 모든 개발도상국으로 퍼지길 바란다. …..하지만 성장이 좋은 소식만 물고 오지는 않는다. 환경의 지속가능성이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듯이 말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많은 경제학자가 말하는 낙관론에 동의할 수 없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자정 장치나 제도적 장치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발전이 천연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염물질 배출을 규제하고 천연자원의 사용이나 남용에 더 높은 비용을 부가하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82) 교육과 공공정책을 통해 그 이상을 구현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3장 「소비주의의 일반이론을 향해」에서 케인스의 예측과 달리 잘못된 노동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진 미국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 모델’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고 문화정책을 수립하기를 조언한다. “문화가 주는 기쁨처럼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없다.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비록 육체적인 훈련은 아닐지라도 음식을 만들고 거주지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필수적인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로마시대 서커스의 현대 버전인 TV프로그램과 스포츠 경기를 보며 즐거움을 찾는다.”(p. 115) 케인스의 윤리론은 정부의 개입에 의해 지금 바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만이 팬데믹 수준으로 만연하고, 가족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너무 일만 하다 보니 정작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문제 있는 행동이다. ……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여가는 덜 즐기고 소비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하는데도 경제학자들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길 꺼린다면, 이는 뭔가 잘못됐으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p.91)

악셀 레이욘후부드 UCLA 교수는 7장 「버터 위에 빵을 얇게 바르기」에서 케인스의 좋은삶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 높은 생활비용, 과시소비, 바쁜 일상 등 현재 미국적 방식의 삶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케인스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p.228)를 많이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주류경제학자들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개인적 생각으론 좀 더 강하게 자신의 관점을 표명해 주면 좋겠다.

레오나르도 베체티 로마 토르 베르가타대 교수는 14장 「어떻게 경제학의 종말이 사회적 책임의 경제학이 떠오르는 계기가 됐을까?」에서 ‘사회적 책임의 경제학’, 그리고 ‘윤리적 소비자’와 ‘시장 사회적 기업’에 의한 새로운 견제와 균형의 체제를 통해 사회적 포용과 의미있는 노동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런 사회적, 윤리적 경제체제는 케인스의 ‘좋은삶’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 구현하는 방법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불평등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케인스의 좋은삶을 점진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것과 똑같다.

 

* Ⅱ, Ⅲ회에서 연속됨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Leave a Reply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